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스탠드업 커뮤니티 이야기

("나는 매일 인생을 새로 쓴다" 책을 언론으로 만나다1) 세상의 아빠를 응원하는 ‘스탠드업 대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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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인환 대표, 2010년 인도네시아 주재원으로 근무하다 경추를 다쳐 어깨 밑으로 마비
⊙ 같 은 경추환우 배성수씨를 돕기 위해 임 대표와 김태양 목사, ‘스탠드업 대디’ 결성
⊙ 현 재 ‘스탠드업 대디’는 ‘스탠드업 커뮤니티’로 확대 … 5개 영역으로 분화돼
⊙ “아빠가 넘어지면 가족이 넘어진다. 가족 전체 돕는 시스템 만들 생각”(김태양 목사)


김태완기자 kimchi@chosun.com


2010년 2월 25일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그 후 기약 없는 병원생활이 시작됐다.
임인환(현 ‘스탠드업 대디’ 대표)씨는 식품 관련 대기업에서 일했었고 당시엔 인도네시아 현지법인의 재무이사로 발령받아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고가 난 그날, 자카르타 현지 회사를 취재하러 기자가 찾아왔다. 함께 사업장으로 스피드 보트를 타고 가던 도중 갑자기 회사 운전기사가 심장마비로 운전대를 껴안고 사망하고 말았다. 보트는 방향을 잃고 밀림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는 어깨 밑으로 대부분의 기능이 마비되는 경추(목뼈) 골절의 중상을 입고 말았다.
경추수술을 받은 후 기도에 구멍을 뚫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원 중환자실에 하루 종일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서너 달 정도 입원하면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몸은 적응이 되지 않고 계속 아프기만 했다. 남은 인생에서 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끔찍하고 괴로웠다. 성경을 읽었는데 많은 말씀 중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한 구절이 위로가 되었다.
가족과 주위 분들의 걱정과 기도, 김태양 목사(당시 분당우리교회 부목사)의 헌신 덕분에 조금씩 평정심이 생겨났다. 그러자 신(神)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어졌다. 병원 천장의 무늬들을 조합해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높은 하늘이나 푸른 산들을 보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피조물인지 느껴도 보았다.
재활병원에 머무르는 시간이 오래되면서 주변 환우들 사이에 벌어진 안타까운 사연들을 자주 접하게 됐다.
환우인 자식에게 매 맞고 욕을 들으며 몸이 부서져라 간병하는 부모들, 반대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무시 받으며 침묵 속에 살아가는 환우들이 많았다.
몸은 마비되었으나 통증으로 독한 약에 의지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는 환우들, 경제적인 문제, 부부간 갈등으로 무너지는 가정들 …. 재산을 치료비로 다 쓰고 집도 없이 병원 등을 옮겨 다니며 생활하거나 급기야 부부의 연을 끊는 환우들도 여럿 보았다.
그러던 중 임인환 대표는 같은 병실에 있던 한 환우를 눈여겨보게 됐다.
배성수씨는 2009년 10월 취미로 운동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졌다. 중환자실에서 5개월 동안 죽다 살아나는 경험을 반복했다. 약 1년 동안 지방병원을 전전하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 재활을 하고 1년 만에 겨우 말을 할 수있게 됐다. 그동안 그는 가족들과 입모양이나 글자판으로, 아니면 눈동자를 돌리며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마비가 풀리길 바라는 기대보다 욕창이라도 완치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엉덩이에는 깊이 7cm 정도 동굴처럼 파인 욕창 때문에 피고름이 났다. 냄새도 심했다. 임 대표는 그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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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배성수)을 같은 병실에서 만났어요.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엉덩이 욕창이 심각한 상태였어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데다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했죠. 저는 성수 형제를 포함해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환우들을 보면서, 제 자신을 비관하며 불평했던 지난 몇 개월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스탠드업 대디’가 만들어지다
임인환 대표는 성수씨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나에게는 언제나 함께하는 가족이 있고,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상대방을 알아보며 인지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게다가 혼자 숨을 쉴 수도 있다. 떠올리기도 싫지만 병상에서 산소호흡기를 차고 말도 못한 채 지냈던 사고 직후 당시를 생각하면 이제는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혜택인가.’
때마침 김태양 목사가 임 대표를 문병 왔다. 그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길래 이렇게 말했다. “성수 형제를 돕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결성된 모임이 ‘스탠드업 대디(Stand up Daddy)’다. 풀이하자면, ‘아빠 일어나!’다. 임 대표, 성수씨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가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했던 ‘달리다 굼’에서 착안한 것이다. ‘달리다 굼’은 유대인이 쓰는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신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마가복음 5, 41)
김 목사와 많은 봉사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보태졌고, 가족 콘서트를 열어 SNS를 통해 성금을 모아 성수씨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노래와 율동 연습을 하고 당시로선 낯설었던 아이폰을 이용해 동영상을 찍었다.

그렇게 모은 성금을 성수씨 가정에 전달할 수 있었고 욕창도 완치됐다. 지금은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졸업장도 거머쥐었다. 학비 지원 역시 여러 후원이 있어 가능했다. 임 대표의 말이다.
“하나님은 은혜로 제게 과분한 분들을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성금을 모으기 위해 마련한 ‘스탠드업 콘서트’ 때 불편한 몸으로 조건 없이 자원봉사를 해 주신 분들, 출연료 없이 재능을 기부해 주신 분들, 본인 살아가기도 힘든 시기에 이웃을 위해 성금을 보내 주신 분들 …. 그분들은 계속해서 제게,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어요.”
성수씨의 말이다.
“‘스탠드업 대디’ 모임에서 항상 외치는 구호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는 듣고, 배우고, 사랑한다’입니다. 신은 ‘스탠드업 대디’ 모임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서로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시며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분께 한없는 영광을 돌리며 감사할 뿐입니다.”
김태양 목사는 오히려 이 두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김 목사의 말이다.
“임 대표님은 여전히 아픈 이들을 위해 지금도 기도하십니다. 성수 형제님은 오늘도 입에 수저를 물고 페이스북에 한 글자 한 글자 찍어 가며 세상과 소통하는 희망의 전도자로 살고 계십니다.”
김 목사는 “이들은 매일매일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이들은 ‘일어난 아빠’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올 때마다 쉬 절망합니다. 쓰러지고 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좌절하죠. 그렇게 생각하면 이 두 형제님은 100번 더 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은 제 선생님이 돼 주셨어요. 제게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 절망 속에서 쉽게 좌절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 주는 선생님이 돼 주셨습니다.”
‘스탠드업 대디’ 모임은 이후 뇌종양 자녀를 둔 택배기사, 기도 협심증에 시달리는 전직 간호사, 무보험 지적·지체 장애소녀 등 다양한 사연의 환우들을 찾아가 정서적·재정적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듣고, 배우고, 사랑한다’
1994년 꿈 많던 대학 1학년 시절이었다. 불볕더위가 전국을 찜통으로 만들던 여름이 끝나 가고 이제 막 가을바람이 불어오려던 9월의 어느 날이었다.
고경호 목사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목뼈가 부러져 이름도 생소한 경추손상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끔찍하고 고통스런 재활의 시간들을 보내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 환경에 적응해 갈 무렵, 강력한 자석에 끌리듯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는 신에게 물었다.
‘하나님! 장애인의 몸으로 신학공부를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저 같은 중증장애인이 어떻게 목회 사역을 할 수 있을까요? 누가 저에게 일을 맡길까요?’라고.
고 목사의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3년간 신학대학원에서 기숙하며 공부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과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인지, 그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선뜻 길을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저할수록 신의 부르심이 더욱 선명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1년 9월 어느 날 키르키즈스탄으로 선교여행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불편한 기내용 휠체어에 앉아 6시간 이상을 날아 도착한 카자흐스탄 공항에서 다시 키르키즈스탄행(行) 비행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비행을 마친 후 새벽에 키르키즈스탄에 도착했다.
고 목사와 처음 마주한 키르키즈스탄의 산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들과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아래로 보이는 산 위의 만년설은 예술작품 같았다.
선교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결코 느껴 보지 못했을 경외감과 찬양이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통역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가 ‘소망’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경호 목사의 말이다.
“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도 제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을 행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저를 감쌌어요.”
더구나 신기하게도 그가 가는 곳마다 장애인을 보거나 만나게 됐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말 매일 장애인들을 마주쳤다. 그때 동행하던 현지인의 말이 들려왔다. “저는 몇 년 동안 길에서 장애인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요즘 장애인을 매일 마주치는 것이 신기하네요”라고.
그는 키르키즈스탄에서 돌아오면서 신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었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김태양 목사와의 만남을 통해 ‘스탠드업’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3년간의 신학대학원을 무사히 마치고 목사 직분을 받았으며 ‘스탠드업 대디’의 확장된 형태인 ‘스탠드업 커뮤니티’에서 ‘스탠드업 영’ 파트의 사역자로 부름 받았다. ‘스탠드업 영(Young)’은 말 그대로 청소년을 섬기는 사역이다.
‘스탠드업 모임’의 봉사자인 이영호씨는 선천성 뇌성마비(뇌병변) 장애인 이다. 휠체어에 의지해 이동할 수밖에 없다. 스탠드업을 만나기 전, 두 번의 허리수술과 뇌성마비 장애로 걸어 다니며 느꼈던 행복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모른다.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
한동안 그는 ‘한국밀알장애인선교단’에서 사역을 했다. 많은 장애우와 마주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다. ‘빨간 신호등’이 들어왔는데 멈추질 않았다. 몸이 버텨 낼 수 없었다.

‘스탠드업 대디’, 또 한 번의 축복
휴식기를 거쳐 ‘스탠드업 대디’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영호씨는 “이것이 제게 다가온 또 한 번의 축복이라 여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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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업 대디’ 모임에 나가게 된 이후로 여러 가지 행사와 준비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가급적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물론 그도 힘들지만 임 대표나 성수씨처럼 더 어렵고 힘든 분들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스탠드업 커뮤니티’의 간사 일을 맡게 됐다. 예전만큼 걸어 다닐 수도 없고, 나이가 들어 기억력도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영호씨의 말이다.
“‘스탠드업 커뮤니티’의 간사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을 많이 경험했어요. 전국의 많은 이가 성수 형제를 만나러 경북 성주의 산골까지 찾아가 작은 콘서트를 연 일이며, 성수 형제가 심리상담 공부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자 다 같이 축하해 주던 날 등 각지에서 기적 같은 시간을 만들어 나갈 때 그 시간들이 가슴 벅찬 행복으로 와 닿았습니다.”
영호씨처럼 ‘스탠드업 모임’을 돕고 있는 나영심씨는 비장애인으로 30년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청각장애 2급 중증장애인이 됐다. 양쪽 귀가 갑자기 안 들리는 신경성 난청이었다. 의사는 약도, 치료할 방법도 없다고 했다.
청각장애인이 되어 은둔생활 같은 삶을 살게 됐다.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시장 가서 상추 한 바구니, 콩나물 1000원어치 사는 것도 상인의 입모양을 봐야 했다. 자신감이 사라지고 대인기피증이 오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돼 버린 것 같았다.
귀가 안 들리니 교회의 찬양 말씀도 들을 수 없었다. 그 무렵 교구 전도사님이 “목사님 설교를 노트에 적어 줄 테니 내 옆에 와서 예배를 드리세요”라고 했다.
“힘드실 텐데요. 죄송해서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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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학교 다닐 때 청각장애 학우에게 강의시간 노트필기를 2년이나 해 줬어요.”
그 전도사는 영심씨에게 “이때를 위함인가 봐”라고 했다. 설교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았다. 집에 와서 읽고 또 읽었다.
소리가 다시 들리기를 기도하던 어느 날 저녁,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영심씨의 말이다.
“2009년 신학교에 입학하고 공부를 하며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정말 많다는 것을 알아 가게 됐어요. ‘나 같은 사람을 어디에 쓰시려고 부르셨을까?’ 계속 묻는 기도를 드렸고, 홀로 고민하던 중, 아주 우연히 스탠드업 커뮤니티를 만났습니다.”
영심씨는 “스탠드업 커뮤니티와의 만남은 기쁜 충격의 연속이었다”며 “하루아침에 집안의 건강했던 아빠가 중도장애인이 되고, 그 가정에 들이닥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통해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스탠드업 커뮤니티로 나아가다
김태양 목사와 고경호 목사, 임인환 대표와 성수씨, 영호씨, 영심씨, 서대용씨 등의 희생과 봉사로 “아빠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여러 곳에서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고 위기에 처한 아빠들과 가정들을 만나는 자리가 생겼다.
김 목사는 “아빠가 넘어지면 가족이 함께 넘어진다.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아프면 가족 전체가 아프다. 때문에 가족의 한 사람만을 돕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족 전체를 통합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아빠, 엄마, 자녀들 그리고 가족 전체를 공동체로서 돕는 방향성이 필요했고, 이런 이유로 스탠드업 대디는 2012년 스탠드업 커뮤니티로 더욱 확장됐다. 현재 스탠드업 커뮤니티는 다섯 가지 영역으로 분화됐다. 스탠드업 대디, 스탠드업 마미, 스탠드업 영, 스탠드업 가족, 스탠드업 교회다. ‘통합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구축됐다. 가족을 돕는 명확한 도시 공동체의 꿈이 세워진 셈이다.
김 목사의 계속된 말이다.
“위기를 만난 이들은 ‘신속하게’ 도와야 합니다. 초기 대응이 중요하죠. 가정에 어려움이 생긴 후 초기 3개월은 재활의 가장 큰 열쇠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 시기에 실제적인 도움이 전달되면 1~2년이 지난 후보다 회복의 효과나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김 목사는 ‘스탠드업 커뮤니티’를 통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가정응급돌봄센터’가 시작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든 생각이 바로 ‘아지트’인데, 지역의 커뮤니티 센터가 가능한, 예를 들어 카페, 식당, 교회가 아지트가 될 수 있어요. 이 아지트를 통해 지역문화를 만들고 신뢰도를 높여 가며,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지역의 응급센터 역할을 하게 하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지역마다 이 커뮤니티 센터를 세우는 비전을 가지고 있어요.”


월간조선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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